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엔리케 구아이타 (문단 편집) ==== [[AS 로마]] ==== 1933년, 구아이타는 팀 동료 [[알레한드로 스코펠리]], [[안드레스 스타냐로]]와 함께 [[AS 로마]]의 유니폼을 입었다. 데뷔전은 [[FC 바이에른 뮌헨|바이에른 뮌헨]]과의 친선경기였고, 첫 경기에는 다소 부진했다. 하지만 곧 적응을 끝마쳤고 적응 이후에는 순조롭게 경기에 참가했다. [[세리에 A]] 데뷔 성적은 32경기 14골. 특히 2번째 상대였던 [[ACF 피오렌티나|피오렌티나]]와의 경기에서 2골을 기록하며 팀에 승리를 안겼고, 그에게 로마 팬들은 Il Corsaro Nero(검은 해적)라는 별명을 붙였다. 그리고 다음 시즌에는 29경기에 출전, 28골을 기록하며 세리에 A 득점왕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. 구아이타의 활약에 힘입어 로마는 4위로 시즌을 마쳤다. 팀의 선전에 자극받은 로마의 보드진은 팀의 문제점을 찾아보았고 그것은 수비라는 결정을 내렸다. 1934-35 시즌 당시 로마는 63득점과 38실점을 기록하여 골득실 마진이 +25로 당시 세리에 A 참가팀 중 가장 좋았지만 로마보다 윗 순위에 위치한 팀들은 20점대 초반의 팀 실점을 기록하였다. 그리고 로마에는 [[귀도 마제티]]라는 뛰어난 골키퍼가 있었기 때문에 [[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|작년 월드컵]] 우승 당시 주전 풀백들인 [[루이지 알레만디]], [[에랄도 몬첼리오]]를 모두 영입하는 화끈한 투자를 선보였고 추가로 노장 공격수 레나토 카타네오까지 영입하여 우승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. 하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. 구아이타의 주동으로 스코펠리, 스타냐로가 1935-36 시즌 개막 전날이던 9월 19일에 '''[[야반도주]]를 해버린 것!''' 비아 파올리나의 막사에서 강연을 돕던 그들은 갑작스럽게 [[제2차 이탈리아-에티오피아 전쟁]]으로 인한 [[징병]]의 두려움[* 이 원인에 대한 소문으로 잘로로시(AS 로마의 별명)을 시기하는 누군가가 퍼뜨린 소문에 구아이타가 낚였다는 이야기가 있다.]에 휩싸였다. 그렇게 차로 라스페치아로 이동한 후, 기차로 벤티밀리아로, 그리고 [[프랑스]]에서 배로 [[아르헨티나]]로 [[런닝맨|돌아가 버렸다]]. 실제로 20만 명 정도의 이탈리아인들이 이 전쟁에서 죽거나 다쳤기도 했고 축구 선수라고 징집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인한 실수였다. 하지만 정작 당시 [[AS 로마]] 동료들도 그렇지만 [[루이스 몬티]]와 [[라이문도 오르시]] 등 같은 오리운디를 포함한 월드컵 당시 동료 누구도 전쟁에 끌려간 선수 자체가 없었다. 게다가 AS 로마는 [[볼로냐 FC 1909|볼로냐]], [[토리노 FC|토리노]], [[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|암브로지아나 인테르]]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쳤지만[* 4팀의 승점차가 4점이었다. 하지만 당시 승리팀에 주어진 승점은 2점이었다.] 승점 단 1점 차이로 볼로냐에게 첫 [[스쿠데토|우승컵]]까지 내주고 말았으니 로마 팬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. 이 해의 팀 득실을 보면 더욱 황당한데 목표한대로 시즌 팀 실점은 20점으로 줄여 최소 실점팀이 되었지만 이번에는 공격진의 파괴력이 떨어져 팀 득점은 전 시즌의 절반 수준인 32득점으로 떨어지고 말았다. 게다가 당시 [[이탈리아]]는 파시스트의 광풍이 휘몰아 치던 시기. 아무리 제2차 이탈리아-에티오피아 전쟁이 명분 따위는 [[카수 마르주]] 속의 [[구더기]]들과 함께 씹어먹어버린 전쟁이라고 해도 병역 기피는 병역 기피였고 덕분에 구아이타는 이탈리아 팬들에게 [[배신자]]로 낙인찍혀버리고 말았다. 그렇게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탈리아 측에서 이들의 [[입국 금지|입국을 거부]]해버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